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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선생의 遊頭流錄(지리산)

by 山梨 똘배 2006. 10. 28.



[중앙일보]

조선 사대부들의 지리산(智異山) 숭배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지리산의 내밀한 메시지를 수신해 유교적 질서를 구현할 단서를 찾고자 했다. 흔히 한번쯤은 지리산 유람을 도모했으며, 혹은 이 산에 거듭 입장하기를 취미로 삼기도 했다. 조선조의 지리산 순례자 중 유독 이채로운 인물이 있다. 바로 남명(南冥) 조식(曺植501∼1572). 조선 중기의 거유(巨儒)였던 남명은 지리산을 자그마치 열두 차례나 올랐다.

글=박원식 '사람과 산' 편집위원 david2010@hanmail.net 사진=신준식 '사람과 산' 기자

남명은 생의 말년을 아예 지리산 자락에 의탁했으며, 거기서 지구별을 은퇴했다. 남명이 머물렀던 곳은 산천재(山天齋).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다. 61세에 산천재를 꾸미고 남명이 쓴 시는 이런 것이었다.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련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 찾아왔다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 건가/ 십리 은하 같은 물만 먹고도 남으리'.

남명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장소를 애써 물색해 이곳을 발탁했다. 그는 지리산의 열심당원이었던 것이다. 지리산을 예배하고 명상해 학문의 지리산, 생의 지리산을 이룬 호걸이었다. 지리산을 관조하고 묵상함으로써 현실 정치의 난바다를 탕탕 호연하게 항해한 인물이었다.

산천재의 백미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1915m)이 조망된다는 점이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는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다.

시천면엔 산천재 외에도 남명 묘지, 덕천서원, 세심정 같은 많은 유적이 있다. 근래에 조성된 남명기념관 전시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성성자(惺惺子)'라는 놋쇠 방울. 흔들면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이 방울은 남명이 평소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닌 품목이었다. 점잖고 근엄한 선비의 허리춤에 방울이 딸랑딸랑? 이 웬 방정맞고도 특이한 기호품이란 말인가. 성성자는 남명의 완구가 아니라 일테면 정신을 감독하는 채찍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쩔렁거리는 방울 소리를 경청해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자꾸만 가다듬었다는 것이다. 남명은 방울과 함께 칼을 또한 늘 허리에 차고 다녔다. 이 칼엔 '내명자경(內明者敬;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외단자의(外斷者義;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타나는 '경(敬)'과'의(義)', 이는 실천 성리학의 거장 남명의 사상을 함축하는 상징 기표다. 그는 내적 수양의 방식으로 '경'을 실현하고, 사회적 실천의 양식으로 '의'를 일관되게 구현한 인물이었다.

16세기 조선의 학계에는 위대한 대학자 두 사람이 있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바로 그들. 이들은 각각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한 영남 사림의 양대 종사(宗師)였다. 퇴계가 온건파라면 남명은 강경파였다. 성리학적 가치에 확고한 기반을 둔 선악 이분법적 자세로써 모순된 현실 정치와의 타협을 거부한 남명의 이데아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 때엔 다수의 남명학파 리더들이 맹렬한 의병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가 이렇다할 벼슬을 하지 않고, 또 번번이 사양한 것은 정치판의 오물에 오염되거나 도구화할 것을 극구 경계한 탓이었다.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산림 거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지조에 찬 재야적 언설로써 세상을 움직였다는 점에 남명의 독보적인 면이 있다.

이제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중산리로 들어간다. 열 두 번째 지리산 등반을 마친 남명은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썼다. 이 기록을 통해 지금의 시천 쪽인 덕산동으로 세 차례 산행에 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산리를 통해 입장했을 가망성이 높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이곳의 어떤 루트를 통해 산에 올랐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오늘날 중산리는 가장 발달한 등산 들머리다. 당일 산행으로 천왕봉에 도착할 수 있는 가장 단거리 코스다. 등산로는 순탄하다. 칼바위를 거쳐 로터리 산장에 이르자 해발 1450m 고지에 자리한 산상 암자 법계사가 나타난다. 가을나무들이 산불처럼 일렁이며 산 위에서 산 아래쪽으로 번지고 있다. 저 멀리 자욱한 운해(雲海) 아래로 지리산의 연봉들이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드디어 천왕봉에 닿는다. 하늘이 가깝다. 금방 하늘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영산(靈山)인가. 하늘의 음성과 계시를 오로지 이 드높은 천왕봉만이 수신할 수 있기에 성산(聖山)인가.

'유두류록'은 남명의 산행이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의 등산은 산에 서린 사람의 역사를 보는 일에 더욱 치중되었다. 마치 허리춤의 방울이 쩔렁쩔렁 소리내어 의식을 일깨우듯 지리산이 통째 성찰을 촉구하는 난타가 되어 그의 사유에 예리한 촉수를 달아주었다. 늘 깨어 있는 사람이었던 남명이 지리산에 들어 더욱 푸르게 깨어났던 셈이다. 그 각성된 마음으로 남명은 지리산에 박힌 인걸들의 행적을 영탄했다. 그는 지리산 탐승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리해 보이고 있다. '물을 보고 산을 보면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았다'. 남명이 지리산에서 본 것은 결국 사람과 세상이었다. 산의 이면에 깃들인 세사(世事)와 해후했다. 그는 천생 냉철한 리얼리스트였다.

남명이 남긴 시 한 수를 읊조리며 천왕봉을 내려온다.


'보게나! 천 석(石)들이 종을/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게 될까?'

지리산의 장엄하고도 묵연한 기풍을 정신의 교사로 묘사한 시편이다. 시의 울림이 묵직한 여운이 되어 가슴을 소용돌이친다. 하산하는 발길이 경건해진다.

그나저나 이 연재도 오늘로 하산이다. 지난 1년간 관심을 가져주신 독자들에게 감사! 감사! 라고 인사드린다. 부디 산의 가호 안에서 행복하시길! 산이 들려주는 매혹의 음성과 산에 스민 인걸들의 혼령이 합주하는 관현악 안에서 안녕하시고 강건하시길!

 

 

 

§ 두류산을 유람한 기행록[遊頭流錄 유두류록]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성종2)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 2950) 와 우란(盂蘭) 2951) 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신열암,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2952) 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묘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를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쳐다보게 되었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
속에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杉],
노송나무[檜], 소나무[松], 녹나무[枏]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말인가.”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 2953) 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 2954) 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畫)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 )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경진일에도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正午)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수리(數里)쯤 가서는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문득 석혈(石穴)을
꿰어 나와서 힘껏 걸어 향적사(香積寺)에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없은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유(窓牖)의 관쇄(關鎖) 및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으므로,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반석(盤石)으로 나가서 바라보니, 육천(▣川)이 길게 연해져 있고,
여러 산(山)과 해도(海島)는 혹은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나기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기도 하여, 마치 장막(帳幕)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회화승(繪畫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못하였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어갔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暘谷)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에서는 모두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하고 만다면
평생 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데를 구경하면서 그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이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에서는 거의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아서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計算)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황석(黃石) 【안음(安陰)에 있다.】
과 취암(鷲巖) 【함양(咸陽)에 있다.】 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
【함음(咸陰)에 있다.】 , 계룡(鷄龍) 【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 【금산(錦山)에 있다.】 , 수도(修道) 【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 【성주(星州)에 있다.】 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황산(皇山) 【산음(山陰)에 있다.】 과 감악(紺嶽) 【삼가(三嘉)에 있다.】 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 【대구(大丘)에 있다.】 , 청량(淸涼) 【안동(安東)에 있다.】 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도굴(闍崛) 【의령(宜寧)에 있다.】 과
집현(集賢) 【진주(晉州)에 있다.】 이고,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 【청도(淸道)에 있다.】 , 원적(圓寂) 【양산(梁山)에 있다.】 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와룡(臥龍) 【사천(泗川)에 있다.】 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병요(甁要) 【하동(河東)에 있다.】 와
백운(白雲) 【광양(光陽)에 있다.】 이고,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팔전(八顚) 【흥양(興陽)에 있다.】 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황산(荒山) 【운봉(雲峯)에 있다.】 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 【광주(光州)에 있다.】 , 변산(邊山) 【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있다.】 , 위봉(威鳳) 【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 【전주(全州)에 있다.】 , 월출(月出) 【영암(靈巖)에 있다.】 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 【장수(長水)에 있다.】 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蜃氣樓)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증봉(甑峯)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炕]도 놓아져 있으니,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戲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구렁[壑]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2955) ,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2956) ? 그렇다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氣槪)를 지닌데다 난세(亂世)를 만났으므로,중국(中國)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유력(遊歷)한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 2957) 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두타 제일이 頭陀第一 두타제일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是爲抖擻 시위두수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外已遠塵 외이원진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內已離垢 내이리구
앞서 도를 깨치었고 得道居先 득도거선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入滅於後 입멸어후
설의와 계산이 雪衣鷄山 설의계산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千秋不朽 천추부후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 2958) 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 2959) 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층[數層]은 유실되었다.

임오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嵐氣)가 편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쪽을 따라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强行)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百圍]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 2960) 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 2961)
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 2962) 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佛]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나마 등람(登覽)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의 직무에 급급하여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그윽하고 기괴함을 두루 탐토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 2963) 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註 2950] 불교(佛敎)에서 인도(印度)의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음력 4월 15일부터
[註 2951] 불제자(佛弟子)가 음력 7월 보름날에 선조(先祖)및 현세(現世) 부모(父母)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十方)의 불승(佛僧)들에게
베푸는 불사(佛事)를 말한다. ☞

[註 2952] 춘추 시대에 양자거(陽子居)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로부터 “거만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의 눈에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덕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거만한 태도를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가 여관에서 묵을 적에 동숙자들이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불쬐는 자들이 부뚜막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그가 태도를 바꾼 뒤에는
동숙자들이 그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 좌석을 다툴 정도로 친숙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寓言 장자 우언》 ☞

[註 2953] 선니는 공자(孔子)를 이른 말인데, 공자가 일찍이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맹자 진심상》 ☞
[註 2954] 한자는 한유(韓愈)를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형산(衡山)에 올라
형악묘(衡嶽廟)에 배알하고 지은 시에 “내가 온 것이 정히 가을비의 절기를 만났는지라,
흐린 기운 깜깜하고 맑은 바람 불지 않아서, 묵묵히 기도하매 마치 응험이 있는 듯하니 어찌
정직함이 신명을 감동시킨 게 아니리오. 잠깐 뒤에 흐린 기운 걷히어 뭇 봉우리 나오자,
푸른 하늘 떠받치는 우뚝한 봉우릴 쳐다보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 한창려집 권삼》 ☞

[註 2955]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전라도에서 일어나
그 무리들이 날로 퍼져가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아 그를
체포하게 하자, 도적들은 바다 가운데 섬으로 도망쳐 있으면서 틈을 타서 가끔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들이 뒤에 장흥(長興)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는 허종이 장흥 부사
김순신(金舜臣)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으나, 그 도적이 오히려
김순신을 쏘아 넘어뜨리고 도망치므로, 허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그 도적을
사로잡아 참수(斬首)했다는 사실이 있으니, 같은 사건인 듯하나 절도사의 이름 등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자세하지 않다. ☞

[註 2956] 이미수는 바로 고려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를 가리킴. 미수는
그의 호이다. 이인로가 일찍이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이란 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한 바위에다가
시(詩)를 써서 남겼는데, 그 시에 “두류산 먼 곳에 저녁 구름 나지막한데, 일만 구렁 일천
바위가 회계산과 같구나. 지팡이 끌고 와서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너머서 원숭이 울음
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머나먼 삼신산에 아득하고, 이끼 끼어 네 글자 쓰인 것도 희미하여라.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이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삼십》 ☞

[註 2957] 불교(佛敎)의 용어로서, 즉 수행(修行)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끊고
불생 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

[註 2958] 비해당은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임.
삼절은 곧 안평대군이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났으므로 일컬은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몽산(夢山)의 그림 족자에 대하여 그 그림과 찬(贊)과 글씨가 모두 안평대군의 작품임을
의미한 말이다. ☞

[註 2959] 중령은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에 있는 천명(泉名)인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혜산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 있는 산명인데 역시 이 곳의 샘물 또한 맛 좋기로
유명하였다. ☞
[註 2960] 옥첩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文)을 기록한 서찰(書札)을 말하고,
옥검은 옥(玉)으로 제조한 서함(書函) 위에 제서(題書)한 것을 말한다. ☞
[註 2961] 하늘에 제사하여 일의 성공(成功)을 고(告)하는 것을 말한다. ☞

[註 2962] 손흥공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손작(孫綽)을 가리킴. 흥공은 그의 자이다.
여동빈(呂洞賓)은 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인데, 세속에서는 그를 팔선(八仙)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백옥섬은 송(宋) 나라 때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도사로서, 그의
본명은 갈장경(葛長庚)이었는데, 뒤에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되면서 이름까지
옥섬(玉蟾)으로 바꾸었다. ☞

[註 2963]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임. 두보의 봉증태상장경기시(奉贈太常張卿垍詩)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있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있도다.
[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 방장삼한외 곤륜만국서]”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 방장산이란 곧 조선의 지리산(智異山)에 해당하므로 이른
말이다. 《杜少陵集 卷三 두소릉집 권삼》 ☞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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