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창고..

시조

by 山梨 똘배 2007. 3. 24.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 )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 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 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대종(大宗)인 경주최씨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그는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서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경주최씨는 신라 말에 명성을 떨쳤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성종 때의 승로(承老:수문하시중), 현종 때의 항(沆:평장사), 충숙왕 때의 해(瀣), 명종 때의 여해(汝諧)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역대 상신·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경주최씨의 세계(世系)는 최치원을 시조로 26파로 나뉘는데, 그 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광정공파(匡靖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이들 6파 가운데서 역사적 인물을 보면, 사성공(司成公) 눌(汭)의 후손인 제우(濟愚)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시형(時亨)은 종수(宗秀)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익현(益鉉)이 있다. 경주시 교동(校洞)에는 '최부자'로 이름난 준(浚)의 집이 있는데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97만 6820명, 가구수 30만 4772가구로, 최씨의 45%를 차지한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제자로 공민왕(恭愍王) 문과에 급제했던 관가정(觀稼亭) ()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辛旽)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上疏)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공민왕23) 첨의중찬(僉議中贊)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禑王) 사복시정(司僕寺正) 되어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洲豊壤) 송산(松山)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며, 이태조(李太祖) 좌찬성(左贊成)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태종14) 9 28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 비석에는 반드시고려의 관직을 쓰라] 유언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조선 소함(召啣) 좌찬성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며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崔致遠)이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 등의 본관으로 나뉘어지고 최치원을 1세조로 하는 경주 최씨에서 최치원의 첫째 아들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으로 분관이 되었고 지손에서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 등으로 분관했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 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으나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 고려시대에 세력을 떨쳤다.

그밖에 김씨에서 최씨로 성을 하사받은 수성 최씨와 중국의 귀화 성씨인 충주최씨가 있다.

최씨는 문헌에 326본으로 나와 있으나 현재는 125개의 본만 전한다.
최씨는 김씨, 이씨, 박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191만 3322명(1985년)이 있다.

- - - - -

경주최씨(=월성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다.
최치원은 869년(신라 경문왕 9년)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간지 5년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 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종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고 아손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 계파 ]

경주 최씨는 26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아래의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 최청
- 광정공파(匡靖公派) : 최단
- 정랑공파(正郞公派) : 최호
- 사성공파(司成公派) : 최눌
- 화숙공파(和淑公派) : 최현우
- 충렬공파(忠烈公派) : 최광위

[ 대표적 인물 ]

- 최승로(承老) :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 최항(沆) : 고려 현종 때 평장사를 지냈다.
- 최제우(濟愚) : 동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 최시형(時亨) : 동학의 제2대 교주이다.
- 최익현(益鉉) :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 최준(浚) : 경주시 교동에서 '최부잣집'으로 이름났다.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일제시대 전재산을 기울여 임시점부 지원 등 독립투쟁에 힘썼다.

최씨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댓글